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텍사스 레인저 (문단 편집) == 역사 == 1823년 [[스티븐 오스틴]](Stephen F. Austin)에 의해 창설되었다. 레인저들은 텍사스가 [[미합중국]]에 가입하기 전부터 존재해온 것으로, [[연방보안청]] 다음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법집행기관으로 꼽힌다. 미국의 일부이기 전 텍사스는 [[무법지대]]였기(미국-멕시코 전쟁으로 흡수되기 전 그 넓은 텍사스 인구는 50만 명 미만이었고, 미국인과 멕시코인들이 뒤섞이고 양국의 기싸움이 더해지며 말 그대로 무법지대였다) 때문에 초창기 레인저는 법집행기관이라기보단 [[자경단]]의 성격이 강했는데 레인저라는 이름도 그런 환경에서 유래된 것이다. 최초의 순직자도 이 시기에 이미 발생했다. 자경단이었던 레인저가 정부기관이 된 것도 오스틴의 덕분으로, 1835년 4월 스티븐 오스틴은 [[멕시코 시티]]의 감옥에서 겨우 석방되어[* 멕시코 정부에 대놓고 텍사스에서 손 떼라고(...) 요구하다가 잡혀들어갔다.] 텍사스로 돌아온 후 정부에 레인저를 산하기관으로 받아들일 것을 적극 권유했다. 10월 17일 임시 지사였던 다니엘 파커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텍사스 레인저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파커 지사는 60여 명으로 구성된 3개 중대를 구성하라고 지시하였으며 현대까지 이어지는 복장 규정과 배지가 처음 레인저들에 의해 착용된 것도 이 시기이다. 당시까지 레인저의 주 임무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무법자들로부터 텍사스의 정착지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텍사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정찰, 간첩 임무를 수행했고 나중엔 [[멕시코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하면서 자경단을 넘어서 군대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텍사스가 독립하여 [[텍사스 공화국|공화국]]이 되자 [[샘 휴스턴]]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휴스턴은 부인이 원주민이었던지라 백인들과 원주민들의 공존에 중점을 둔 정책을 시행했고 덕분에 레인저들의 입지가 위축되기도 했다. 1838년 12월 미라보 라마(Mirabeau B. Lamar) 대통령이 취임하자 원주민들에 적대적으로 정책이 바뀌면서 레인저는 체로키, 코만치족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샘 휴스턴이 다음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유화정책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휴스턴은 정원을 150명까지 늘려주는 등 레인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원을 해주었는데 이는 당시 텍사스의 진짜 적이었던 멕시코군 때문. 이 당시 레인저들은 [[콜트(총기회사)|콜트]] 패터슨을 구매함으로써 미국 최초로 리볼버를 제식 권총으로 사용한 조직이 되었다. 텍사스 공화국이 미합중국에 합방되면서 [[미국 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레인저들은 [[미군|연방군]]에 편입되어 멕시코군과 맞서 싸웠는데, 레인저들이 해당 지역의 지리나 환경에 익숙했기 때문에 레인저를 미군으로 편입시킨 건 탁월한 선택이었고 모두가 알듯 전쟁은 미합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텍사스 레인저들은 텍사스 주정부 산하기관으로 돌아가 가끔 국경을 넘어와 깽판을 치는 멕시코인들이나 퇴치하면서 평화롭게 살려고 했으나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바탕은 텍사스 인이기에 레인저 역시 [[아메리카 연합국]]에 동조했고 상당수는 남부연합군에 자원입대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텍사스 레인저들은 군에 입대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거나 기타 면제 사유가 있는 이들이 이끌었다. 이런 상황을 미합중국이 두고 볼 리가 없었고 결국 텍사스 레인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어 1874년에나 부활하게 된다. 텍사스 레인저가 해체된 자리는 텍사스 주경찰(Texas State Police)가 대체하고 있었다. 1870년에 창설된 텍사스 주경찰은 불과 3년 존속되다가 남북전쟁 이후 최초의 텍사스 주지사인 리처드 코크가 여전히 설치고 다니는 멕시코놈들과 원주민들을 소탕할 필요를 느껴 텍사스 레인저를 재창설하면서 해체되었다. 지금의 법집행기관 면모가 부각되기 시작한 건 이 무렵인데 멕시코인들과 원주민 문제가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느 정도 통제가 되자 일반 무법자들이 레인저들의 타겟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모한 레인저에게 시련이 닥친 건 1930년대로, [[대공황]]이 닥치자 위기에 빠진 텍사스 주정부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레인저들을 45명까지 줄였다. 예전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수지만 철도와 자동차가 어느 정도 갖춰졌기 때문에 예전보다는 빠르게 주 전역을 돌아다니는 것이 가능했기에 시행된 조치였다. 이후 미리암 퍼거슨 주지사가 당선되자 그녀는 레인저를 모두 전역시키려는 극단적인 정책을 시행했고 레인저의 정원은 32명까지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주정부의 메인 수사기관[* 1929년 텍사스 고속도로 순찰대가 설립되면서 주경찰이라고 할 만한 조직은 갖추고 있었다.]인 레인저를 작살을 냈으니 범죄자들이 텍사스로 몰려들었는데 그 유명한 [[보니와 클라이드]]가 이 당시 텍사스에서 악명을 떨친 대표적인 범죄자였다. 이에 텍사스 주정부는 고속도로 순찰대와 레인저를 아우르는 텍사스 공공안전부, 지금의 DPS를 1935년 8월 10일 설립하는 것으로 범죄에 맞섰다. 레인저가 고속도로 순찰대를 비롯한 다른 법집행기관들과 SRT 등으로 합동 근무를 하게 된 것도 이 당시 다같이 DPS 산하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다.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이 되자 다시 인원도 충원되기 시작했고 장비 지원도 잘 받았는데, 덕분에 1930년대 후반에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법의학연구소를 보유했을 정도였다. 고속도로 순찰대와 DPS에서 같이 근무하게 되자 업무분장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레인저는 수사, 일반 경찰활동은 고속도로 순찰대가 담당하는 지금의 형태가 정착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